뇌는 몸과 따로 떨어져있지 않습니다.
"뇌 건강은 몸에 영향을 주고, 반대로 몸 건강도 뇌에 영향을 줍니다."
당연한 이야기이죠. 하지만 이 당연한 이야기가 양방에서 뇌전증을 치료할 때는 의미가 없습니다.
이런 양약을 복용하면, 뇌전증이 호전되는 경우도 있지만,
- 조금 호전되긴 하지만 증상이 지속되는 경우
- 전혀 호전되지 않는 경우 (약물 난치성)
이런 경우들이 생깁니다.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
뇌전증은 '뇌 신경이 어느 순간 갑자기, 과도하게 흥분'해서 발생합니다. 그렇다면 왜 뇌 신경이 갑자기 흥분하게 되었을까요?
뇌전증은 단지 뇌 만의 문제가 아니라, 뇌가 아닌 다른 신체 부위의 문제가 영향을 줘서 생긴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들입니다.
단지 저만의 주장이 아니라, 전 세계 여러 연구진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. 뇌만 보고 치료를 했더니 한계가 존재하더라. 그래서 뇌 이외의 다른 영역도 연구해야 한다는게 요즘의 추세입니다.
뇌전증을 오래 연구했고, 치료해왔던 사람으로서 참 다행인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.
그렇다면, 어떤 요인들이 뇌를 흥분시켜서 뇌전증을 일으킬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.
소화기 기능과 뇌전증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. 실제로 뇌전증을 가진 환자분들 중에서
라고 호소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죠. 실제 연구결과들도 이 호소들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. 위 연구를 요약하면,
- 총 120명의 뇌전증 환자와 113명의 건강한 사람을 비교
- 건강한 사람이 '기능적 위장 장애 (소화기 기능 저하)'를 39.8% 보이는 반면, 뇌전증 환자는 62.5%에서 '기능적 위장 장애'를 보임
- 장(腸) 에 분포하는 신경 구조는 중추 신경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. (자율신경계 - 시상하부 - 뇌하수체 축)
이처럼, 뇌전증 환자분들은 건강한 사람에 비해서 소화기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. 이 외에도 소화기 증상과 뇌전증이 관련이 있다는 연구는 아주 많죠,
위의 소화기 기능 문제가 '상부 소화기', '위(胃)의 기능 문제'라면, 하부 소화기, 장 (腸) 기능의 문제도 뇌전증에 영향을 줍니다.
특히나, 장내세균총 (Gut Microbiome)의 변화, 조성, 문제는 뇌 신경에 아주 큰 영향을 줍니다. 따라서 뇌전증 뿐만 아니라 자폐증, 발달장애, ADHD, 틱장애 등의 뇌 신경질환과 장 기능과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다는 것은 정설입니다.
위 연구들은 장 기능 (장내 세균총)과 뇌전증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입니다. 한 두 건의 연구가 아니라 아주 많은 연구가, 장과 뇌전증과의 관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.
- 뇌전증을 앓고 있는 사람과 건강한 사람의 장내 세균 조성이 다르다는 연구들입니다.
- 2017년에는 뇌전증과 크론병 (지속적인 설사를 하는 자가면역질환)을 동시에 앓고 있는 환자에게 '대변 이식술 (건강한 사람의 장내 세균총을 환자의 장 속에 직접 주입하는 처치)'을 했는데, 크론병과 함께 뇌전증도 사라졌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.
(66He Z, Cui B-T, Zhang T, Li P, Long C-Y, Ji G-Z, et al. Fecal microbiota transplantation cured epilepsy in a case with Crohn’s disease: the first report. World J Gastroenterol. 2017;23(19):3565–8.)
- 항생제를 투여했을 때 발작 빈도가 줄어든다는 연구들
(Braakman HM, van Ingen J. Can epilepsy be treated by antibiotics? J Neurol. 2018;265:1934–6.)
- 프리바이오틱스 보충제를 복용했을 때 경련의 빈도가 줄어들었다는 연구들도 존재합니다.
(Gómez-Eguílaz M, Ramón-Trapero JL, Pérez-Martínez L, Blanco JR. The beneficial effect of probiotics as a supplementary treatment in drug-resistant epilepsy: a pilot study. Benef Microbes. 2018;9(6):875–81.)
이처럼, 장 기능, 장내 세균총의 변화는 뇌 신경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고, 결과적으로 뇌전증의 발생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연구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습니다.
수면과 뇌전증이 연관이 있다는 연구는 아주아주아주 많습니다.
실제로 뇌전증이 없는 사람도, 수면이 아주 심각하게 박탈당하거나 수면 부족이 오래 지속되면 경련을 하기도 합니다.
잘 때는 뇌가 쉬면서, 정보를 저장, 정리하고, 뇌 조직을 재정비합니다. 그런데 수면의 문제가 있으면 뇌의 흥분도가 떨어질 수가 없고 당연히 뇌전증이 잘 발생할 수 있습니다.
의사들의 뇌전증 교과서에도 수면과 뇌전증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.
또한, 특정한 뇌전증들은 수면 중에만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고, 낮에도 나타나지만 수면 중에 유독 더 심하게 발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. 이런 경우도 수면과 뇌전증이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되죠.
뇌전증은 또, 우리 몸의 면역 체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. 위 논문은 '뇌전증과 면역 체계'라는 논문입니다.
참고로 이 논문은 'JAMA Neurology' 라는 저널에 실린 논문입니다. 이 저널은 Impact Factor 29.9점의 저널로, 전 세계적으로 큰 공신력이 있는 논문 중 하나입니다. 그만큼 믿을만 하다는 이야기이죠. 연구 결과를 보면
- 전신성홍반성루푸스 (자가면역질환) 환자의 약 20%가 뇌전증을 보임 (일반 인구의 약 8배)
- 웨스트증후군 (영아연축)은 항간질제보다 스테로이드 (면역조절제)가 더 효과적임
- 레녹스-가스토 증후군 아이들은 혈액 속의 IgG 농도가 증가한 경우도 있음
- 특정 뇌전증들은 혈액 내 면역 세포의 조성 변화가 있음
- 면역을 조절하는 면역 글로불린을 투여했을 때 뇌전증 증상이 상당히 감소한 경우가 있음
이런 여러가지 연구들을 종합했을 때, 면역 기능의 이상과 연관이 있는, 면역 문제가 원인이 되는 뇌전증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.
또한, 알레르기 질환이 있는 아이들은 뇌전증 위험도가 올라간다는 연구도 존재합니다.
- 비염이 있는 아이들은 뇌전증이 생길 확률이 76%증가함
- 비염이 있는 아이들은 뇌전증 진단 시기가 더 빠름 (더 일찍 뇌전증이 생김)
- 특히 남아의 경우 위험도가 더 높음
몸에 열이 많은 아이들은 뇌전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집니다.
우리 몸의 신경은 체온이 올라가면 더 쉽게 흥분하게 되고, 체온이 떨어지면 진정됩니다.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고열이 날 때, 경련을 하는 경우들이 생기죠.
몸에 열이 많은 아이들, 특히 머리쪽으로 열이 많이 쏠리는 아이들은 뇌전증 증상이 쉽게 생깁니다. 이런 아이들은 몇 가지 특징을 보입니다.
- 활동량이 너무 많다.
- 말도 많고,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아서, 뇌가 언제 쉬는지 모를 정도다.
- 조금만 뛰어놀아도 얼굴,머리가 다 젖을 정도로 땀이 흠뻑 난다.
- 잘 때도 머리에 땀이 많다.
- 반대로, 많이 움직였을 때, 더울 때, 얼굴이 빨개지는데 땀은 나지 않아서 더 위험해 보인다.
이런 성향을 지닌 아이들은 머리쪽에 열이 많이 몰리게 되고, 뇌전증 증상이 더 잘 생깁니다.
영유아기의 격렬한 뇌전증 증후군 중 하나인
"드라베 증후군"
을 가진 아이들은 이렇게 열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아주 흔합니다. 그리고 ADHD와 뇌전증을 동시에 가진 아이들, 열성 경련으로 시작했다가 뇌전증으로까지 진행된 아이들에게서 이런 열이 원인이 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.
ADHD나 발달장애, 자폐증과 같은 '신경발달장애' 질환이 있는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뇌전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집니다.
- ADHD가 있는 사람은 뇌전증이 발생할 확률이 약 4배 높습니다.
-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은 약 20배 가까이 더 자주 발생합니다.